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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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초대대회로 3월 3일부터 3월 20일까지 진행되었다.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그 선수노조가 합쳐서 만든 WBCI(World Baseball Classic, inc)에서 주관한 첫번째 대회이기도 하다. 최초 계획은 2005년에 개최되려 했으나 스폰서 문제나 대회 진행 문제등을 이유로 1년 연기되어 2006년에 개최되었다. 창설 과정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항목 참조.
대한민국 대표팀은 아테네 올림픽 본선 탈락에 한[3] 과 이치로의 30년 발언에 대한 분노에 휩싸인 한국[4] 의 4강 진출과, 한국과 같이 아테네 올림픽 본선 못 갔는데도 대진표를 저렇게 짜고도 4강에도 못 간 미국의 병크, 마지막으로 디즈니랜드에 생긴 정신과 시간의 방(어?).[5] 또한, 이승엽은 이 대회에서 초대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며 대활약[6] 하여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은 대회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전에서 8회 역전 투런포와 미국전에서 솔로홈런 후 받은 고의사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2. 개최장소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개최되는 경기장은 메이저리그 구장들 및 스프링캠프 구장이 선정되었다. 미국 외 경기장은 미국의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와 일본의 도쿄돔이 선정되었다. 경기장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아시아 라운드와 상위 라운드를 제외하면 WBCI 측에서도 관중 동원수를 크게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의 흥행을 하게 되자 2009년부터는 최소 2만석 이상의 구장[7] 을 개최구장으로 지정한다.
3. 본선 진출 국가
초대 대회인데다, 축구, 농구, 배구등 세계화가 잘 되어있는 스포츠에 비해 참여할수 있는 국가가 적은 관계로 예선전 대신 WBCI가 참여할 국가들을 추려낸후 초청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
4. 대회준비
4.1. 대한민국
김인식호/2006년 문서 참조.
4.2. 미국
1회 대회 때 미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초호화''' 멤버로 나왔기 때문에[8] 예선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미국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자 지금까지도 종종 야구 커뮤니티에선 '''저 사기팀을 대체 어떻게 이긴겨?'''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멤버를 동원했는데 막상 발리자 대충대충 하기로 마음먹은건지 2회 대회에 나온 미국 대표팀 멤버의 네임밸류는 1회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 떨어지는 편. 미국 팀은 이번 대회에서 이런저런 망신을 많이 당해서 미국 야구 전문가들의 혹평을 받기도 했다. Team USA가 아니라 Team U[9] 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
4.3. 일본
일본의 경우 마쓰이 히데키가 시즌 준비를 이유로 불참했지만 스즈키 이치로를 필두로 다수의 메이저리거를 합류시키는 동시에 자국리그 에이스로 MLB 진출이 유력하던 마쓰자카 다이스케까지 합류시키며 역대 최강의 라인업이라고 자부할 정도였다.
사실 2006 WBC 이전까지 마쓰이 히데키는 자국 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스타였지만 이번 대회 불참으로 인해 인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반면 뛰어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 이기적, 거만함 등의 이미지로 인기가 없던 이치로는 조국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위대한 주장'으로 재평가되어 둘의 인기가 완전히 역전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또한 대회 준비중 스즈키 이치로의 30년 발언등으로 논란이 일기도했다.[10]
5. 대회 진행
5.1. 본선 1라운드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1라운드/A조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1라운드/B조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1라운드/C조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1라운드/D조
5.2. 본선 2라운드
5.3. 결선 토너먼트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결선 토너먼트 항목 참조.
6. 우승
7. 최종 순위
8. 개인 순위
8.1. 타자
- 타수
- 홈런
- 안타
- 타점
- 득점
- 도루
- 사구
8.2. 투수
- 선발 등판
- 이닝
- 승리
- 패배
- 홀드
- 세이브
- 삼진
9. ALL WBC TEAM
10. 논란
상당히 큰 문제점을 표출했던 대회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여름 개최를 주장했지만 미국의 의향대로 3월에 개최되었다. 초청국가 16개국을 MLB에서 관심을 두는 마켓으로 선정한지라, 야구 아마추어인 유럽국가들은 대부분 초대받지 못한데다 쿠바 선수단의 미국 입국을 거부하려고까지 했다. 결국 쿠바는 우승금 전액을 당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 지방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참가. 그러나 정작 우승은 일본.
그리고 제일 큰 논란은 미국이 결승에 올라가기위해 상대적으로 강한 중남미를 피할 수 있도록 짜여진 리그방식이 구설수에 올랐고,[11] 편파판정과 경기진행(밥 데이비슨으로 대표되는 미국 심판 전면배치, 미국전에서 일본은 역전할 수 있었던 기회를, 멕시코는 홈런을 잃어버렸다. 멕시코의 경우는 홈런이 2루타 사건 참조) 등등도 문제가 되었다.
소문난 잔치에 주인 밥상만 있는 WBC
아름답지 못한 미국의 억지승…심판 판정 번복으로 점수무효
[WBC] 추악한 미국 일본에 ‘어거지 첫승’
11. 대회후 평가
11.1. 의외의 흥행
시작했을 때 별 관심을 못 끌었던 것에 비해, 큰 인기와 큰 수익을 올렸던 대회였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NBC, ABC(미국 방송), FOX 같은 주요 방송 네트워크들의 외면 속에 케이블 스포츠 방송인 ESPN이 '''500만 달러[12] 라는 공짜와 다름 없는 돈을 주고 얻었는데''', 미국 vs 캐나다의 경기를 132만 명이 시청하면서 그해 최고 시청률 프로그램을 기록할 정도였다.
이 대회가 예상밖으로 (돈 버는 것이) 성공적인 대회였기에 2회대회가 열릴 수 있었다.Financially, the WBC was deemed succesccful, with Major League Baseball earning an estimated $10-15 million above costs of $45-50 million, including 5$ million in television rights fees paid by ESPN only three months before the ournament. Television ratings for the first tournament were solid in the U.S. and soared in Asian and Latin American nations, including a 36 share in japan for that country's semifinal game with KOREA.
재정적으로 WBC는 성공적이었다. 메이저리그는 대회 3개월을 앞두고 ESPN측이 지불한 TV 중계권료 500만 달러를 포함하여 4,500만~5,000만의 개최 비용을 제외하고도 1,000만~1,500만 달러를 더 벌어들였다. 1차 대회 시청률은 미국에서뿐 아니라, 한국과의 준결승에서 일본이 36%를 기록하는 등 아시아와 중남미에서도 높았다.
'''『Sports Marketing』 | Michael J. Fetchko, Donald P. Roy, Kenneth E. Clow 공저.'''
11.2. 한국 야구계에 끼친 영향
이 대회는 한국 야구의 국제적 위상을 본격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훨씬 예전의 일이긴 하나 허구연 해설위원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984년 다저스에 연수를 갔을 때 한국도 야구를 하고 프로야구도 있다고 하자 미국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2006년 기준으로도 소수의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 야구계에 대한 인식 자체는 좋지 못했다. 과거 미, 일 올스타전을 치른 경험도 있었고 스즈키 이치로와 노모 히데오의 활약 이후 성공하는 메이저리거들이 늘어났던 일본에 비해 아오안 수준의 취급을 당했었다.
하지만 한국 팀이 일본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고 미국의 사기 팀도 대파하는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이변을 일으키자 이때부터 한국 야구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MLB.com의 기자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들인가?(Who are these guys, anyway?)"라고 했을 정도.[13]##
일본에서도 한국이 축구를 잘해도 야구는 아오안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자기네와 강력하게 맞먹는 것에 경악·분노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14] .
어쨌든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 야구가 여전히 미국이나 일본 야구보다는 수준이 낮게 평가되더라도 예전보다는 평가가 훨씬 좋아졌다. 외신들도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등 이후의 국제대회에서 한국 팀의 선전에 찬사를 보내기는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이변인 것처럼 보도하진 않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러나 2013년과 2017년부터 대굴욕을 겪게 되는데...
11.3. 병역특례
2002년 월드컵의 병역특례[15] 와 이에 따른 K리그의 부흥, 해외진출의 기회를 보장받은 박지성, 이영표의 성공을 바라보던 야구계에서는 WBC 4강 달성 후 '축구와의 형평성'을 논하며 "'''야구 월드컵'''의 지위를 인정하여 병역특례를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11명의 미필자들이 병역특례를 받았다. 기존 병역법 시행령인 올림픽 동메달, 아시안 게임 금메달, 월드컵 16강에 WBC 4강이 새로이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해당 시행령에 대해 '축구와 야구를 제외한 타 종목과의 형평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고[16] 결국 2007년 12월 월드컵과 WBC 둘 다 동시에 특례가 폐지되었다. 1회 WBC 이후 개정된 병역법이 2회 WBC를 치루기 전에 다시 바뀐 것. 이후 치뤄진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지난 대회보다 더 높은 준우승이라는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병역특례를 받지 못했다. 어차피 병역문제 해당자가 추신수, 박기혁, 최정, 임태훈으로 4명밖에 없긴 했다. 게다가 박기혁을 제외한 셋은 다음해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특례를 받았지만 박기혁은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17] 하며
한편 이 과정에서 병역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진영과 정성훈이 병역 특례를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8]
[1] 메이저리그 공인구 제조사인 롤링스에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공인구 라인업.[2] 준우승: 60만 달러 / 3위: 40만 달러 / 4위: 30만 달러 / 5~8위: 22만 5천 달러 / 9~12위: 15만 달러[3]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당시 대만에 역전패 당한 충격이 컸던 이유였다. 일본은 난적이었으니 어차피 진다고 해도(국민 정서로는 용납이 안되겠지만) 아쉽진 않으나 잡아야 했던 대만전을 허무하게 내줬으니 충격과 허탈감이 배가 된 것이었다.[4] 대놓고 표출하진 않았지만 당시 선수단들의 반응은 "저 쉐이가!"에 가까웠다. 물론 한국을 특정하게 지목한 것은 아니었으나 30년이란 말 때문에 그야말로 감정이 상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첫 상대가 대만이었다는 점에서 선수들도 긴장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5] 본선 2라운드에서 한국, 일본에게 패배했던 멕시코가 "어차피 질 건데 디즈니랜드에서 놀다 오자"라며 미국전을 앞두고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다 왔다. 그리고 미국전에서 미국의 발목을 잡아버렸다(!).[6] 4경기 연속 홈런을 포함해 5홈런 10타점[7] 히람 비손이 있지만 18,000석으로 거의 2만에 가깝다.[8] 명예의 전당 선수만 3명이나 있고 로켓맨과 A-ROD은 약물 복용 논란 때문에 이미지를 많이 깎아먹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최고의 선수들이었다.[9] '''U'''nderperforming or '''U'''ninspired or plain-old '''U'''gly.[10] 다만 이 부분은 어느정도 악의적인 편집이 이루어 졌다. 자세한 내용은 스즈키 이치로 항목 참조.[11] 덕분에 한국은 일본에게 2번 이기고 1번 져서 탈락.[12] 한화 약 60억원.[1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시아 야구는 일본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국야구는 사실상 이때 처음 접하게 된 것이었고 여기에 공,수 양면에 상당히 기본잡힌 탄탄한 모습을 보여주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14] 당장 프로팀으로 구성된 국대팀들간의 대결에서 일본의 성적이 '''의외로(일본의 입장에서) 좋지 않았다.''' 더구나 아시아 프로야구의 역사가 긴 일본으로서는 '고딩'연배의 한국 프로야구에게 1번도 아니고 2번씩이나 졌다는 사실이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15] 참고로 당시 축구대표팀은 16강 진출로 받았다. 4강진출로 받은 것이 아니다. 2002월드컵 기타 항목 참조.[16] 다른 스포츠는 국제대회 우승해도 병역특례를 못 받는데 왜 축구랑 야구는 해당 국제대회 4강 진출만으로도 병역특례를 받냐는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며 여론이 반대로 돌아선게 크게 작용했다. 애초에 2002년 월드컵 병역특례도 국민여론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고.[17] 방어율 5점대의 임태훈도 승선할 정도로 2회 WBC 병역 특례 무산에 대한 보상차원(실제 여론도 긍정적이었고)에서라도 갈 법 했는데 6월에 골절상을 당하면서 도저히 뛸 수 없는 몸이 된데다가 음주운전 콤보까지 겹쳤다.[18] 그러나 이미 시드니 올림픽 때 병역특례를 받은 박진만의 사례가 있었다.